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현, 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 │ 전, 서울특별시자치구공단이사장협의회 회장)
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현, 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 │ 전, 서울특별시자치구공단이사장협의회 회장)

[중앙뉴스 칼럼= 박근종 이사장]고급 두뇌와 초격차 기술 확보가 경제발전의 추동력(推動力)이자 경제성장의 모멘텀(Momentum)인 시대에 기초과학 분야는 물론이고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인재 엑소더스(Exodus │ 해외 유출)’이 심상치 않다. 디지털 대전환을 넘어 인공지능(AI)이 생활, 사회, 산업 등 인류의 삶을 총체적으로 바꾸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분초를 다투는 첨단기술 패권 경쟁 시대다. 앞으로 AI를 잘 활용하는 기업·국가들은 그렇지 않은 기업·국가들을 대체해 나갈 것이다. 이는 세계 각국의 AI 패권 전쟁이 격화하는 이유이자 전 세계가 AI 패권 장악을 위해 가속페달을 밟아야 할 당위(當爲)다.

무엇보다도 세계 최대 ‘파운드리(Foundry │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가 주목할 발표를 했다. 지난 7월 18일 ‘2분기 실적설명회’에서 “파운드리 2.0 시대를 열겠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파운드리 2.0은 반도체 업계에서 생소한 표현이었지만 요지는 파운드리 핵심인 웨이퍼에 회로를 구현하는 전(前)공정 영역뿐만 아니라 반도체를 포장(패키징)하고 검사(테스트)하는 등 후(後)공정 영역까지 TSMC가 서비스를 강화해, 사업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업계는 TSMC의 이번 발표가 새로운 성장 기회를 도모하는 한편, 현 시장 독점 구조 등에 대한 우려를 지우기 위한 야심 찬 의도라고 보고 있다. 대만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트렌트포스에 따르면 TSMC는 올해 1분기 시장점유율은 61.7%에 달한다. 2위 삼성전자(11.0%)와 큰 격차를 벌리며 선두를 달리고 있다. 그런데 패키징·테스트 영역을 포함한 이번 집계로 전환하는 경우 지난해 점유율이 28%로 줄어든다. 독점 우려를 해소할만한 지표를 새로이 제시하고, 패키징 매출 확대에 초점을 맞춘 전략을 세운 셈이다.

특히 반도체 경쟁국인 대만이 무서운 기세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해오고 있다. 대만반도체산업협회(TSIA)에 따르면 올해 대만의 파운드리 종사자 수는 14만 3,105명으로 지난해의 13만 2,504명보다 7.4%인 1만 601명이나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만 정부는 2021년 매년 1만여 명의 반도체 인력 확보를 입법화해 전폭 지원하는 데다 TSMC 등 기업들이 파격적 대우로 인재를 대대적으로 끌어모으고 있다. 기술 인재가 우대받는 분위기 속에 대학에서는 이공계 열기가 뜨거워져 해마다 550명 이상의 석·박사급 반도체 두뇌가 배출되고 있다.

미국도 2022년 발효된 ‘반도체지원법(Chips Act)’에 따라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설비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반도체 생산 보조금(390억 달러)과 연구개발(R&D) 지원금(132억 달러) 등 모두 527억 달러(75조 5,000억 원)를 지원할 계획이다. 민·관이 참여하는 미국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는 2018년 12월 3일 ‘성공 과정 도표 작성, STEM 교육을 위한 미국의 전략’ 보고서를 내고 연방 정부 차원에서 STEM 교육을 위해 5년간 약 3조 3,350억 원을 투자해 미래 컴퓨팅과 디지털, 사이버 보안 등 첨단 산업에서 일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도록 장려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최근 인력 양성 프로그램 가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실리콘밸리 ‘빅테크(Big tech)’들은 압도적 최고 수준의 연봉과 근무 환경을 앞세워 전 세계 인재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중국도 첨단기술 굴기(倔起 │ 우뚝 일어섬)가 미국을 추월할 기세다. 저가 공세와 기술 베끼기에 능한 추격자 이미지를 벗고, 개구리가 점프하듯 훌쩍 성장하며 첨단기술 최강자로 자리매김하려는 모양새로 중국 첨단기술 학계의 연구 수준은 이미 미국을 넘어섰다. 영국의 과학 학술지 네이처가 전 세계 최상위 학술지 145종에 지난해 게재된 논문 7만 5,707편을 분석해 영향력을 점수화한 결과를 나타낸 ‘2024 네이처 인덱스’에서 중국이 올해 처음으로 미국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2위는 미국, 3위는 독일, 4위는 영국, 5위는 일본, 한국은 작년과 같은 8위에 머물렀다.

연구기관별, 대학별 순위에서도 중국의 위상은 세계 최고(Top) 수준이다. 연구기관 중 네이처 인덱스 세계 1위를 차지한 중국과학원 등 10위권 내 7곳이 중국의 대학 부설 및 정부연구소들이었다. 대학들의 연구 수준도 중국이 앞섰다. 1위는 미국 하버드 대학이 차지했지만 2~9위는 중국 대학들이 휩쓸었다.

미국 조지타운대 ‘안보·유망기술센터(CSET)’에 따르면, 내년에 중국이 배출할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박사 인력만 8만 명으로, 세계 최대 규모다. 미국의 연간 박사 배출 규모의 2배가 넘고, 미국 시민권자 출신 박사 규모와는 4배나 차이가 난다. 1994년 ‘백인(百人)계획’을 시작으로 2008년에는 세계적 수준의 학자·교수 1,000명 유치를 목표로 한 ‘천인(千人)계획’까지 추진했다. 이러한 ‘천인(千人)계획’은 인재 유출에 대한 세계 각국의 비판이 거세지며 2019년 중단됐지만, ‘만인(萬人)계획’·‘치밍(啓明)계획’ 등으로 이름만을 바꿔가며 유사한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2019년부터는 ‘고급 외국인 전문가 유치 계획’을 통해 첨단신소재, 정보통신 등 전략 핵심 분야에서 인재 유치에 나섰고, 2020년엔 해외 고급인재의 영주권 취득 기준까지 완화했다. 기술혁신을 위해 해외 인재를 영입하고 국제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방침은 지난 3월 중국 양회(兩会)의 10대 민생과제에서도 강조한 바 있다. 중국은 이런 성과를 ‘개구리 점프기(Leapfrog period)’로 평가한다.

일본도 최근 10년 새 외국 전문인력 유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면서 외국인 취업자 중 전문인력 비중은 2012년 18.5%에서 2021년 22.8%로 4.3%포인트 증가했다. 2021년 기준 한국의 외국인 전문인력이 5.3%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무려 4배가량 많은 수치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약 253억 달러의 지원금을 마련했다.

이 중 167억 달러는 구마모토 남부 TSMC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2곳과 자국 벤처기업‘래피더스(Rapidus)’의 홋카이도 공장에 지급한다. 래피더스는 2027년까지 2㎚(1㎚=10억분의 1m) 칩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민간 투자를 포함해 총 642억 달러를 투입해 2030년까지 일본 내 칩 생산 매출을 963억 달러로 약 3배 늘리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유럽도 유럽 내 반도체 제조 역량을 확대하기 위해 약 463억 달러 규모의 계획을 세웠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반도체 제조 역량 강화에 공공 및 민간 투자가 1,080억 달러 이상 투입될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반도체 인재 확보 경쟁에서 크게 뒤처지고 있다. 우선 한 해 배출되는 전체 박사 수가 1만 7,760명(2022년 기준 │ 한국연구재단)이며 이중 이공계열은 40%에 그친다. 그마저도 졸업 후엔 탈(脫) 한국을 택하는 분위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공계 학부생 및 석·박사 고급 연구개발 인재 30만 명 이상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서 최근 10년간 매년 3만~4만 명씩 한국을 떠났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우리의 반도체 인력 증가 속도는 2021년부터 10년 동안 연간 4,100명 정도에 그칠 듯하다. 정부가 아무리 반도체 인재 육성을 외쳐도 경쟁국에 비교해 턱없이 낮은 보상에 미래 불확실성, 부정적 인식 등이 중첩돼 이공계 외면, 의대 쏠림이 심화하고 있다.

한편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2019~2028년 10년간 국내 과학기술 인력 수요는 71만 3,000명, 공급은 70만 3,000명으로 공급이 1만 명이나 부족하다. 더 큰 문제는 공급되는 과학기술 인력의 약 절반이 비(非) 과학기술 직무에 종사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 두뇌 유출은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다. 스위스 로잔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International Institute for Management Development)’이 평가한 한국의 ‘두뇌 유출 지수’는 2021년 5.28(24위)에서 2023년 4.66(36위)으로 추락했다.

3년 만에 0.62점 12단계나 낮아졌다. 해당 지수가 0에 가까울수록 인재가 외국으로 더 많이 나간다는 의미다. 게다가 치열한 글로벌 인재 유치전 속에서 한국의 우수 두뇌를 향한 경쟁국들의 손짓은 갈수록 거세져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의 해외 유출이 가속화될 것으로 크게 우려된다. 이대로 가면 2031년 반도체 인력이 5만 4,000명가량 부족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고급 두뇌 확보와 초격차 기술 확보는 국가대항전 양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글로벌 반도체 대전(大戰)의 승패를 결정지을 승부처다. 각국 정부가 인재 확보와 기술 개발의 큰 그림을 그리는 건 미국·중국·대만뿐 아니라 전 세계적 추세이자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시대적 조류(潮流)이다. 이러한 흐름에 선제 대응을 위해서는 큰 그림의 ‘방향’을 설정하고 실행력 기반의 ‘속도’를 갖춰야 한다. 당연히 K-반도체 재도약도 고급인재 양성과 초격차 기술 개발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급 두뇌를 육성하고 지켜야만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초격차 기술을 개발할 수 있어서다. 따라서 뛰어난 국내외 고급인재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한국 상황에 필요한 지원을 제때 속도감 있게 연구·거주 환경을 조성해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인재 풀(Talent pool)’을 넓히는 일을 서둘러야만 한다.

고급인재들이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미래를 걸고 명운(命運)을 맡길 수 있도록 이공계 교육 인력·장비 투자를 확대하고 상응한 보상 체계를 서둘러 혁신하는 등 현실적인 대책도 조기 마련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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